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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이야기

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커피

by CANCOFFEE 2024.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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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인류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커피를 마시기 전과 커피를 마신 후의 우리의 역사는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커피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우리 인류의 삶에 많은 기여를 한 점과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커피재배에 식민지의 노동착취라는 불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인류의 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커피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커피하우스
커피하우스

지식의 장소 커피하우스

 

지식의 장소 커피하우스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는 정해진 자리가 없으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면 누구나 의자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습니다. 평등이라는 이러한 위대한 특권은 인류의 황금시대와 커피하우스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철학자들이 홀로 고독하게 고매한 성찰로 진리를 구했다면 근현대 철학의 장은 바로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었습니다.

 

그 만남의 장소로 가장 각광받았던 카페, 커피하우스는 당시 신분도 계급도 없이 평등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여성참정권조차 보장받지 못했던 시대였던 만큼 여성은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커피도 마실 수 없었으니 당시 바흐가 작곡한 커피 칸타타라는 노래에는 커피 마시고 싶어 하는 딸과 못 마시게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담겼을 정도입니다.

 

커피하우스가 당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상업이나 정치의 연장선에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커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성들은 커피와 커피하우스에 빠진 남성들에게 불만을 터뜨려 '커피가 남편의 정력을 앗아간다''출산율을 저해한다' 등의 이유로 왕실에 공동 청원을 올리고 마침 커피하우스 내의 토론과 정치 활동이 마뜩잖던 영국 국왕 찰스 2세 역시 커피하우스 폐쇄령을 선포하기도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커피하우스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벌였던 활동은 가히 독보적이었습니다. 각종 코론 및 강의, 때로 문학이나 음악 연주 등이 벌어져 커피하우스는 '1 페니 대학'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커피하우스에서 1 페니를 내고 커피를 마시면 대학 못지않은 지적 경험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여러 위인들의 일화도 전해지는데 처음으로 중력 이론을 발표한 아이작 뉴턴의 위대한 저작의 탄생에는 사과의 낙하보다 케임브리지 커피하우스의 공이 더 크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국부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런던 브리티시 커피숍에서 해당 저서를 대부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혁명'과 함께한 커피

혁명과 함께한 커피가 파리에는 런던보다 20년 늦은 1672년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생기는데 그중 1686년 문을 연 카페 프로코프는 아직까지 건재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페로 꼽힙니다.

 

이곳 역시 계몽주의자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으로 유명했으며, 루소, 디드로, 볼테르 등이 단골로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볼테르는 하루에 커피를 40잔씩 마시는 커피 애호가였으며, 세계 최초의 근대식 백과사전이자 프랑스혁명이 사상적 배경이 된 '백과전서'를 이 카페에서 구상했다고 합니다.

 

파리의 또 다른 유명 커피하우스이자 프랑스혁명의 진원지로 알려진 곳은 바로 카페 드 푸아로 프랑스혁명을 직접적으로 촉발한 시민봉기가 일어나 곳입니다. 1

 

789년 7월 12일 프랑스 혁명기의 변호사이자 언론인이었던 커 미유 데물랭은 경찰 및 정부 스파이들이 감시하는 와중에도 대담하게 탁자에 올라 권총을 높이 빼들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합니다.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이틀 후 바스티유 감옥이 시민들에게 함락되었고,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1700년대 영국에서 시작해 7800년 초 다른 유럽 국가 및 북미로 번진 커피의 인기는 또 하나의 혁명에 박차를 가합니다.

 

바로 산업혁명이었습니다. 당시는 공장 제도가 발전하면서 삶과 사고방식, 식습관에 변화가 몰려오던 때였으며, 특히 도시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은 악조건의 생활환경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여자와 아이까지 공장의 노동 전선에 뛰어들면서 살림을 돌보고 요리할 시간도 부족해 커피와 빵으로만 연명하다시피 했습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 영양분을 섭취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업가와 광고업자들은 갖가지 선전을 통해 근로자들에게 커피를 어필했습니다. 하루를 잘 넘기도록 기운을 차리게 해주는 활력소로 광고하는가 하면, 선전에 과학을 동원한답시고 휴식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 일의 능률이 향상된다는 논문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검은 황금이 검은 눈물이 된 커피

검은 황금이 되기까지 검은 눈물을 흘린 커피 생산국과 원주민들의 삶은 역사적으로 줄기차게 처참했으며, 오늘날 아직도 벗어나는 중입니다.

 

컵의 가치가 높아져 강대국 사이에서 '검은 황금'이라고도 불린 19세기에서 20세기 역사를 살펴보면 유럽에서 미국까지 경제력과 군사력을 동원해 커피 생산국을 마음대로 주물러 왔습니다.

 

많은 커피 생산국들이 커피 생산이라는 족쇄에 묶여 개발 초기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부유한 서구 국가들의 요구에 맞춰 커피를 재배해야 했습니다. 커피 생산은 아프리카 내 영국이나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많은 국가의 발전을 제한했습니다.

 

일례로 케냐와 말라위 정부는 자국 내 커피농장에 대한 소유권이나 통제권을 주장할 수 없었으며, 벨기에의 통치 아래 있던 중부 아프리카 국가 부룬디에서는 1933년부터 모든 농부가 의무적으로 최소 50그루 이상이 커피나무를 재배해야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커피 생산국이 식민지지배를 벗어났지만 시민봉기, 사회변도, 경제불황, 정치 불안정, 외국의 통상금지 조치로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시기적으로 커피녹병과 시장 불안정, 기근까지 덮쳤습니다. 식민통치가 끝난 후 새롭게 들어선 정부도 딱히 이전 정부에 비해 나을 것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결국 수많은 비국이 발생했습니다.

 

모두 커피를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온통 비극뿐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커피 재배의 역사는 행복하기만 한 성공담은 찾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이상으로 우리 인류의 격동의 역사를 주도했다할 커피, 커피의 명암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즐기는 커피가 많은 사람의 노동과 땀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커피가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지금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행복한 시간에 감사의 마음도 가진다면 더욱 풍요로운 삶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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